[동양풍 100제] 36. 뒤뜰엔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by 망고쨈

 




“부제님 때문에 대체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아 미안 미안. ”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장계를 보는 둥 마는 둥 딴청을 피우던 붉은 옷의 사내는 들려오는 불만의 목소리에 싱긋 웃어보였다. 불만의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 미소에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유화 여럿 울린다는 그의 미소였지만 그의 앞에 앉아있는 여인 화랑에게는 통하는 법이 없었다.



“뭐 그래서 더 재미있는 법이지만.”

“네?”



속으로 생각하던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장계를 훑기 시작했다. 불만의 목소리를 내긴 했지만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아무런 미동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억울하고, 이 날씨 좋은 봄날 백년은 묵은 능구렁이 같은 남자와 집무실에 박혀 장계처리나 해야 한다니 짜증이 솟구쳐 올라오는 듯 했다. 게다가 저 능구렁이는 장계를 처리하는 둥 마는 둥 설렁설렁하고 대부분의 장계 처리는 자신이 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자신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평상시에도 자신이 맡고 있는 전삼부의 업무에 대해서만 사사건건 걸고넘어지고, 일을 일으키지 않는가. 오늘 새벽까지도 그 일들을 정리하느라 잠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업무를 일찍이 마치고 동료들이 꽃놀이를 가있는 틈에 비어있는 서고를 뒤져볼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납치하듯이 집무실로 끌고 와서는 난데없이 본인의 업무를 도우라니. 안하무인에도 정도가 있지 너무한 것이 아닌가.



“부제님. 전 미시[오후1시~3시]까지만 도와드릴 것입니다. 전삼부의 화랑으로서, 부제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도리이기는 하나 이 일은 전삼부에 관련된 일도 아닐뿐더러,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전 선약이 있습니다. 다른 화랑들과 오늘 꽃놀..”

“꽃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만 일은 그렇지 않다. 풍월주님은 지금 며칠째 일에 시달리고 게시고, 이 몸 또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데 감히 꽃놀이를 나가? 신국의 기강이 이리도 무너져서야.. 다들 돌아오면 꽃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것이다."



그깟 꽃놀이 하루 간다고 해서 신국의 기강이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만.. 이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꽃놀이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나 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찡그렸던 얼굴을 피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말도 없이 꽃놀이를 가려 했던 것이 괘씸하기는 하나 자신의 무리한 요구에 투덜거리면서도 따라주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였다.



“그러고보니 업무를 꼭 집무실 안에서만 처리하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예?”



자리에 일어난 그는 자신의 뒤편에 있는 창을 열었다. 창을 열자 펼쳐지는 풍경에,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속을 끓던 그녀도 절로 탄성을 지었다. 분홍빛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마치 분홍빛 구름이 자욱하게 뒤뜰로 내려앉은 듯 하였다. 도화 말고도 다른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 뒤뜰을 화려하게 채워 장경을 연출하였다. 바람이 불자 도화가 휘날리며 달콤한 향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이런 좋은 곳을 두고 집무실 안에서만 계셨습니까?”



그의 옆으로 다가와 선 그녀가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 노림을 웃음으로 넘기며 그는 장계더미를 들어 올렸다. 그녀 역시 그를 따라 장계더미를 들고 밖으로 따라 나섰다. 밖에서 본 풍경은 안에서 본 풍경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그를 따라 뒤뜰의 작은 정자로 들어가 장계더미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어린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도 좋으냐?”

“선문 안에 이런 좋은 곳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곳을 알았으면 굳이 밖으로 나가지 말고 이곳에서 꽃놀이를 해도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다들 이곳은 알고 있지만 들어와 꽃놀이를 할 엄두는 못 낼 것이다.”



그의 말에 그녀가 시선을 돌려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내가 가꾼 곳이다. 불청객은 반기지 않아.”

“예? 정말요? 부제님께 그런 취미가 있으셨습니까? 의외입니다. 여인들을 희롱하는 재주만 있으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하얀 백도복숭아 같아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차 한 듯 그의 눈치를 살짝 살피던 그녀가 그의 비위를 맞추듯 실실 웃었다.



“문, 무, 예 뿐만이 아니라 꽃에도 해박하시니 과연 화랑중의 화랑이십니다”

“트인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뒷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심하거라. 화랑중의 화랑은 풍월주인 것을.”

“아. 예에..”



풍월주의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 작은 흔들림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풍월주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미세하게 반응하는 그녀가 계속 거슬려왔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풍월주 역시 그녀를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듯하였다. 언제나 철두철미하고, 감정의 변화가 적은 풍월주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이 여인화랑과 풍월주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그래서 풍월주에게 그녀에 대해 은근히 운을 띄어보기도 하였지만 그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일일 것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나저나 이 장계들을 어서 처리해야죠. 이 좋은 봄날에 장계더미에 파묻혀 있을 수만은 없잖습니까? 빨리 처리하고 여기에서라도 꽃구경을 좀 해야겠습니다!”



상념을 깨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에 앉아 장계를 펼쳐드는 그녀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그도 자리에 앉아 장계를 펼쳐들었다. 하지만 장계를 보려 노력을 해도 계속 눈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장계에 집중하고 있는 얼굴을 보니 복숭아가 찌푸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저런 표정이 아닐까 싶어 그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빨리 장계더미를 처리하고 그녀와 조촐한 꽃놀이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선을 다시 장계로 돌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이 퍽퍽해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보인건 장계에 얼굴을 박고 잠에 빠져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빨리 처리하자고 한게 누구인데..”



자신 앞에 무방비상태로 잠에 빠진 여인을 깨우기 위해, 몸을 그녀에게로 기울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가득 들어온 얼굴에 멈칫 몸이 멈춰 섰다.

햇빛 아래에서 수련을 하거나 낭도들을 훈련시키는 일들이 많았기에 여인치고는 그을린 얼굴이다. 여인이라는 생각을 떼어내고 보면 곱상한 사내 녀석이라고 착각할 법한 외모였다. 특히 조신함과는 거리가 먼 그 괄괄함이 그녀를 여인의 모습과는 동떨어지게 하였다. 하지만 가끔씩 보이는 말간 미소는 사내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기도 하였다. 여인답지 않은 행동거지였지만 가끔씩 보이는 섬세함이 그녀를 더욱 더 여인답게 보이게 하였다. 그 모습이, 장식을 위해 꺾이고 다듬어져 화병에 꽂힌 꽃 같은 규방의 여인이 아닌 생생한 들꽃같은 모습이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도 모르게 손을 내리고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속눈썹도 꽤나 길었다. 코와 입술도 오밀조밀해 보기 좋았다. 지금은 이렇게 남복을 하고 있지만 다른 여인들처럼 분을 바르고 치장을 하면 사내 여럿 잠 못 이루게 할 미색이리라. 다른 우매한 사내놈들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모를테지. 나만 알고 있는 보물 같은 느낌에 내심 흐믓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문득, 풍월주가 떠올랐다.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 눈, 자신에게 그녀의 안부를 넌지시 묻던 입, 그녀의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유심히 듣던 귀, 그녀 주위를 배회하던 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짓던 미소.

너도 알고 있는 것이냐. 그래서 꽃냄새를 맡은 벌처럼 그녀 주위를 맴도는 것이냐. 그의 눈동자가 순간 어두워졌다.



“어쩌지... 난 내거 남이랑 나눌 생각은 없는데..”



풍월주와 그녀가 어떤 사이든 상관없다. 중요한건 자신의 앞에 있는 그녀가 맘에 들고, 다른 사람과는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것 아닌가.

다시 자리에 앉아 턱을 괸 그는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어두운 빛을 담고 있는 눈동자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었다.



“그러니까, 좀 더 나에게 시달려야겠어. 진명.”



바람이 불며 도화향이 코끝을 간질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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